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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고구려의 식문화는 오늘날 한국 음식문화의 기반 1편카테고리 없음 2022. 11. 5. 18:43
고구려의 맥적(貊炙)이 숯불갈비(불고기)의 기원이다 이명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0. 서론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 정권이며 그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현재 중국의 영토에서 활동하였던 나라라는 사실을 내세운다. 매우 단순하고 황당한 논리다. 이러한 중국 측의 주장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이 세운 나라이므로 우리 역사다”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구려의 멸망 이후를 생각해 보라. 고구려민의 일부만이 신라에 흡수될 뿐이다. 그리고 일부는 당으로 이주하게 되어 고선지 장군 같은 이는 서역에서 당나라 사람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 일부는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서 발해를 건국한다. 나는 이렇게 답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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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의 역사카테고리 없음 2022. 11. 4. 23:56
이제 김장철이다. 우리는 김장을 매년 큰 행사로 하고 있다. 우리가 날마다 먹고 사는 김치는 언제부터 먹게 되었을까? 김치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약 3천 년 전의 중국문헌 '시경(詩經)'이며, 오이를 이용한 채소절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저(菹)'라는 글자가 나온다. 김치에 관한 첫 기록도 2600 ~ 3000년 전에 쓰여진 중국 최초의 시집 시경(詩經)에 "밭두둑에 외가 열렸다. 외를 깎아서 저(菹)를 담자"는 구절이 있는데 가 염채, 즉 김치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공자가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말(韓末)경의 사전인 석명(釋名)에도 의 설명이 나온다. ▲ 출처 : 한겨레, 김치의 원조랄 수 있는 오이김치, 오이소박이는 신선하지요.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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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麗)를 가문의 성씨로 쓰고 있는 일본인카테고리 없음 2022. 11. 4. 22:50
高句麗 왕족을 모시는 "고마진자(高麗神社)" ▲ 일본의 도쿄 북서쪽 히다카시 사이다마현에 있는 고마진자와 高麗씨의 가계 족보 아시아의 대제국으로 군림했던 高句麗는 668년 연남생을 앞세운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그러나 高句麗 황족의 핏줄은 바다 건너 일본 땅에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도쿄(東京)에서 전철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고마가와(高麗川)역에 도착하면 광장에 우뚝 선 한국식 장승이 눈에 띈다. 일본 고마씨의 총본산 高麗神社는 여기서 1.5㎞쯤 더 들어간 산기슭에 있다. ▲ 기차역 두 곳의 명칭이 高麗驛과 高麗川驛이다. 역 앞 광장에 서있는 장승 ▲ 고구리 왕족 약광의 60대 후손 고마 후미야스가 일본땅에 처음 뿌리를 내린 조상을 모신 신사의 본전을 가리키고 있다 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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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국제일본 고구려후손 "우린 보장왕 아들 60대손"카테고리 없음 2022. 11. 4. 22:36
▲ 고마 신사 전경 히타카시에 있는 1300년 고찰 고마 신사.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들 약광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고구려 역사기념관 건립 구리시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홍도암, 최광민) 회원 99명이 일본에서 1300여년 동안 60대(代)를 이어 살아온 고구려 후손들을 만나기 위해 4일 대한해협을 건넌다. 일본 사이타마현 히타카시(市)에 살고 있는 고구려 후손들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들 약광(若光)의 자손들로 일본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716년 무사시(武藏)지방에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하고 약광을 초대 군수로 임명해 같이 망명한 1799명을 옮겨 살도록 했다. 이들 후손들은 26대까지는 고구려 자손끼리 혼인해 혈통을 이어 오다가 그 뒤 일본인들과 혼인해 지금은 거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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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사료들 “한사군, 요동에 있었다”… 韓은 일제 왜곡 학설 추종카테고리 없음 2022. 11. 4. 22:27
영토 분쟁 사안 ‘한사군 위치’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2017년 4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라고 말했으니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일제히 나서서 반박해야 하는데 지금껏 조용하다. 대신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 당국자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대응했지만 제대로 된 반박은 아니다. 시진핑의 말이 실제 역사사실과 다르다는 구체적 사료를 가지고 반박해야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말은 ‘따지면 불리’한 쪽에서 주로 쓰는 수사이기 때문이다. ▲ 허베이성 루룽현의 옛 영평부 서쪽 성문. 중국 사료들은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현의 옛 영평부에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시진핑이 고려나 조선이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