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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高麗)를 가문의 성씨로 쓰고 있는 일본인
    카테고리 없음 2022. 11. 4. 22:50

    高句麗 왕족을 모시는 "고마진자(高麗神社)"


    ▲ 일본의 도쿄 북서쪽 히다카시 사이다마현에 있는 고마진자와 高麗씨의 가계 족보

     

     

    아시아의 대제국으로 군림했던 高句麗는 668년 연남생을 앞세운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그러나 高句麗 황족의 핏줄은 바다 건너 일본 땅에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도쿄(東京)에서 전철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고마가와(高麗川)역에 도착하면 광장에 우뚝 선 한국식 장승이 눈에 띈다. 일본 고마씨의 총본산 高麗神社는 여기서 1.5㎞쯤 더 들어간 산기슭에 있다.

     

     


    ▲ 기차역 두 곳의 명칭이 高麗驛과 高麗川驛이다. 역 앞 광장에 서있는 장승

     

     


    ▲ 고구리 왕족 약광의 60대 후손 고마 후미야스가 일본땅에 처음 뿌리를 내린 조상을 모신 신사의 본전을 가리키고 있다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는 아버지 시즈오(澄雄ㆍ77)가 맡고 있는 고리신사의 대표직인 궁사(宮司)를 언젠가는 물려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잘 오셨습니다. 저는 高句麗 황족의 60대 후손입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高句麗 후예란 자부심을 갖고 살아 왔습니다. 저는 한국인을 외국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조상 대대로 전해온 사실을 숨기거나 더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가 들려준 가문의 유래는 "703년 야마토(大和)정권은 高句麗의 멸망으로 돌아갈 땅을 잃어버린 보장왕의 아들 약광(若光ㆍ잣코)에게 왕(王)이라는 성(姓)을 하사했고, 약광은 간토(關東)지방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高句麗 출신 1,799명을 이끌고 무사시노(武藏野) 벌판 일대에 정착해 이곳이 고려군(高麗郡)이 되었으며 약광이 군장으로 부임했다는 내용이 일본의 고대 역사서 <속일본기>에 나옵니다. 그는 사절단으로 666년 일본에 왔다가 2년 후 고국이 망하자 돌아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국땅에 뿌리내린 高句麗의 후예는 高麗라는 국호를 성씨로 삼았다. 일본에선 高句麗를 高麗로 표기하고 '고마'라고 읽는다.

     

    약광이 죽자 군민들은 그의 위덕을 기리기 위해 어전의 뒷산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 지내면서 ‘고마명신’이라 불렀다. 이렇게 해서 고려신사가 만들어졌고, 그 일대는 716년부터 "고려군(高麗郡,고마군)"으로 명명됐으나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름이 달라지게 되었다. 고려군은 고려촌과 고려천촌으로 이뤄졌다. 고려촌에는 고려신사를 중심으로 지역 곳곳에 高句麗의 유적이 흩어져 있다. 이곳 사람들은 ‘고려향’이라 부른다. 高句麗인들은 당시 미개척지이던 이 지방을 개간하고 평화롭게 살았다.

     

     


    ▲ 고마진자의 모습

     

     

     

    ▲ '고리왕묘'라는 현판이 붙은 사당

     

    26대까지는 高句麗인끼리만 결혼해 혈통을 보존했다. 가마쿠라에 막부를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혼맥을 맺고 가신이 되기도 했다. 후미야스는 별실에서 '고리씨계도(高麗氏系圖)'를 가져와 보여주었다. 약광부터 60대 후손인 자신에 이르기까지 빼곡히 집안의 내력을 기록한 족보였다. "일본에서 이런 계도를 간직한 집안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 가문의 자부심은 여기서 나온 겁니다. 어릴 때부터 高句麗의 후예라는 것을 알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어머니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자세하게 듣게 됐다"고 말했다.

     

    "사춘기 시절 정체성의 문제는 없었을까." 이 질문에 고마 후미야스씨는 "있었다"고 대답했다.

     

    하나는 高句麗의 후손이라는 대목에서 일본에 살고 있으면서도 일본인이 아니고, 둘째는 고려신사의 후손으로 (대를 이어 궁사직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직업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점에서 정체성의 갈등이 한때 있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고려군이 설치된 지 42년 뒤 인근 지역에 신라군도 생겨난다. 본토에서는 대립했던 高句麗와 신라였지만, 이곳에서는 동포지간으로서 유대와 교류를 통해 함께 이곳을 개척해갔다. 당시 일본 나라 정부는 高句麗ㆍ백제ㆍ신라 유민들을 환대했다. 高句麗인들은 말타기와 농업기술을 전해주고, 신라인들은 건축과 미술에 영향을 주는 등 선진문물의 교량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 고리산 성천원(高麗山 聖天院)의 유래가 한글과 일본어로 적혀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개편되는 변화 

    • 고려군(高麗郡) → 이루마군 → 히다카시, 쓰루가시마시, 한노시 → 히다카(日高)시<고려촌>

    • 고려신사 → 다카구신사(1898년) → 약광에 대한 제사 금지 → 일본 천황신 제사

    • 고구려 후예들인 고려씨는 26대까지는 고구려인끼리만 결혼해 혈통을 보존했으나 일본인과의 통혼으로 현재는 일본인화됐다.

    • 무로마치막부(14세기) → 고려 종가(宗家)만 남고 모두 분가해 다른 성씨를 쓰게 됐다.

    • 고려의 직계 혈통은 50여 명에 불과하다.

    • “조국을 잊지 말라”는 결의를 다지고 슬기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과시하기 위해 고마(高麗)라는 성을 지켜온다.

    • 현재까지 고려인들의 족보가 전해져오고 있다고 밝혔다.

     

     

    고마 가문에 위기가 온 것은 14세기 무로마치 막부 때였다. 정권과 반대편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자칫 멸문의 화를 당할 뻔했다. 고마 가문은 종가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분가해 다른 성씨를 쓰게 됐다. '다시는 전쟁에 나가지 않는다'는 가훈이 내려오는 것도 이때부터다. 고마 가문도 근대 이후 일본에서 행해진 한반도 출신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때 결혼 상대를 찾기가 힘들었다고 하며, 집안 형편도 궁핍을 면치 못했고 대부분 다른 지방으로 떠났지요." 그래서 지금 고마씨 직계 혈통은 50여명 남짓한 단출한 씨족에 불과하다.

     

     

     


    ▲ 고마진자(高麗神社)의 유래가 한자가 섞인 한글로 적혀있다.

     

     

    근자엔 "이곳을 참배하면 출세한다."는 소문이 퍼져 정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시데하라 기주로(弊原喜重郞) 등 이 신사를 참배한 정치인들이 차례로 총리대신이 되자 약광이 '출세의 신'으로 떠받들어지게 된 것이다. 신사 입구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조부인 마타지로(又次郞) 전 체신장관의 기념식수도 눈에 띄었다. 최근엔 연간 40만 명이 이곳을 찾을 정도로 번창하고 있다.

     

     

    고마 가문은 자신의 혈통이 맞닿아 있는 한국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매주 목요일엔 신사에서 한국어 강좌를 5년째 계속하고 있다. 후미야스 본인도 일곱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또 매년 10월엔 재일동포 조직인 민단과 함께 마을 축제를 열고 있다.

     

     

    후미야스는 최근 高句麗사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유적을 보러 중국 지안(集安)에 간 적은 있지만 우리 조상이 중국계란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다"며 "나는 한민족의 후예"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高句麗는 高句麗사로 족한 것"이라며 "한국이든 중국이든 정부가 국가간 자존심 싸움에 高句麗를 끌어들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민들에게 "高句麗 역사를 잘 전승하고 유물.유적 보존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 

     

    잃어버린 인류의 역사 환단고기 (real-histo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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